불법파견 문제는 오랫동안 기업 인사·노무 담당자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제입니다.
도급·용역 형태로 외주를 운영하고 있다면 한 번쯤 이런 고민을 해보셨을 겁니다.
"우리 회사 협력업체 직원들, 혹시 불법파견으로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만약 파견관계가 인정되면, 직접 고용할 때 근로조건은 어떻게 정하지?"
첫 번째 물음, 즉 불법파견 성립 여부에 대해서는 자동차 제조업을 중심으로
수많은 대법원 판례가 쌓이면서 어느 정도 판단 기준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무에서 진짜 큰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습니다.
직접고용이 결정된 이후, 그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2024년 대법원은 한국도로공사 사건을 통해 이 쟁점에 대한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습니다.
오늘은 이 판결을 중심으로, 기업이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을 차근차근 정리해보겠습니다.
📌 파견법이 정한 직접고용 시 근로조건의 원칙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 제6조의2 제3항은,
불법파견이 인정되어 직접고용의무가 발생했을 때 적용될 근로조건을 두 가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① 동종·유사 업무 근로자가 있는 경우
사용사업주의 근로자 중 해당 파견근로자와 같거나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는 근로자가 있다면,
그 근로자에게 적용되는 취업규칙상 근로조건을 그대로 적용합니다.
② 동종·유사 업무 근로자가 없는 경우
해당 파견근로자의 기존 근로조건 수준보다 낮아지지 않도록만 하면 됩니다.
얼핏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실무에서는 ②번 상황이 훨씬 복잡합니다.
'기존 근로조건보다 낮아지지 않는다'는 최저선만 정해져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근로조건을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공백을 대법원이 2024년 판결로 채운 것입니다.
✅ 대법원 2024년 한국도로공사 판결의 핵심 법리
대법원은 2024. 3. 12. 선고 2019다223303 등 판결에서,
동종·유사 근로자가 없는 경우의 근로조건 결정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여 접근했습니다.
🔹 유형 ① 자치적 형성이 원칙
사용사업주와 파견근로자가 '기존 근로조건을 하회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율적으로 협의해 근로조건을 정하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 유형 ② 자치적 형성이 어려우면 법원이 결정
사용사업주가 근로자파견관계 자체를 부인하는 등의 이유로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는,
법원이 다음 요소들을 종합하여 합리적으로 정하였을 근로조건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 근로의 내용과 가치
- 사용사업주의 근로조건 체계 (고용형태·직군별 임금체계 등)
- 파견법의 입법 목적과 공평의 관념
- 사용사업주가 직접 고용한 다른 파견근로자가 있다면, 그 근로자에게 적용한 근로조건
다만 대법원은, 이렇게 법원이 직접 근로조건을 정하는 것은
한쪽 당사자에게 의도하지 않은 근로조건을 불합리하게 강요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 유형 ③ 적정한 근로조건을 찾을 수 없는 경우
여러 요소를 고려해도 적용할 만한 합리적인 근로조건을 찾을 수 없다면,
결국 파견법 제6조의2 제3항 제2호에 따라 기존 근로조건을 적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 판결의 실제 적용 — 통행료 수납원 vs 상황실 보조원
이번 판결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같은 한국도로공사 사건 안에서도 직종에 따라 결론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 통행료 수납원 — 조무원 근로조건 적용 타당
통행료 수납원은 2008년경 외주화가 완료되어 한국도로공사 내에 동종·유사 업무 근로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은 이 경우 현장직군 중 가장 낮은 수준의 직종인 조무원의 근로조건을 적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조무원은 경비·청소·식당조리 등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 반복 잡무를 수행하는 직종임
- 그럼에도 통행료 수납원의 근로가치가 조무원보다 낮다고 볼 수 없음
- 외주화 이전에도 통행료 수납원은 청소원이나 경비원보다 높은 임금을 받았음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면,
합리적인 사용자라면 통행료 수납원을 직접고용하면서 조무원의 근로조건을 적용하는 데 동의했을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 상황실 보조원 — 조무원 근로조건 적용 불가
같은 회사 내에서도 상황실 보조원에 대해서는 결론이 달랐습니다.
상황실 보조원은 주로 당직근무 형태로 일하는 직종인데,
조무원과는 근무형태와 근로시간이 서로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했을 때 노동강도가 조무원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고,
업무 내용의 차이까지 감안하면 상황실 보조원의 직무가치가 조무원과 같거나 그보다 낮다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즉 합리적인 사용자라면 상황실 보조원을 직접고용하면서
조무원의 근로조건을 그대로 적용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취지입니다.
결국 상황실 보조원에게는 기존 근로조건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 이 판결이 갖는 의미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핵심적으로 짚어야 할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동종·유사 근로자가 없다고 해서 법원이 무조건 정규직이나 일반직의 근로조건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과 성격, 노동강도 및 난이도, 근무형태, 임금구조의 차이 등을
종합한 결과 직무가치가 동등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한하여
예외적으로 해당 직군의 근로조건을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파견법의 입법 목적은 파견근로자의 고용불안 해소와 열악한 근로조건 보호에 있습니다.
채용 절차나 업무수행능력, 근로의 내용과 가치를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는
사용사업주 정규직의 근로조건을 100% 보장하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이 판결 이후 하급심에서도 근로자파견관계 성립은 인정하면서도,
원고들이 주장하는 근로조건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금전지급 청구를 기각한 사례가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 기업 실무에서의 시사점
불법파견 분쟁이 확대되면서 제조업뿐 아니라 도급·용역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산업에서 근로자파견관계 성립이 인정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일부 기업은 선제적으로 협력사 근로자들의 직접고용을 결단하기도 합니다.
외주화된 업무를 다시 내부로 끌어오는 인소싱(insourcing)은 조직 규모 확대,
인사·노무 비용 증가, 노사관계 변화 등 기업에 상당한 부담을 줍니다.
특히 직접고용 시 기존 직원들과의 처우 차이로 인한 노노(勞勞)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새로 고용하는 근로자에 대한 근로조건 설정에 매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번 판결이 주는 실무적 교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동종·유사 근로자 여부를 엄격하게 검토하라
파견법 제6조의2 제3항 제1호의 '동종·유사 근로자'가 존재하는지를 형식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업무 내용·형태·가치를 기준으로 엄격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② 직무가치를 기준으로 근로조건을 설계하라
직접고용이 결정된 경우,
해당 근로자의 직무 성격·노동강도·근무형태 등을 면밀히 분석해 합리적인 근로조건 설계의 근거를 마련해두어야 합니다.
③ 선제적 직접고용 시 협의 과정을 반드시 기록하라
자발적으로 직접고용을 결정한 경우에도 근로조건은 노사가 자율적으로 협의해 정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협의 과정과 근거를 문서화해 두는 것이 나중의 분쟁 예방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마무리하며
불법파견 이슈는 '파견관계 성립 여부'라는 첫 번째 관문을 넘고 나면,
'어떤 근로조건으로 고용하느냐'라는 두 번째 관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4년 대법원 판결은 이 두 번째 관문에 대한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핵심은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직무가치에 기반한 균형 있는 처우입니다.
사내 도급·용역 구조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라면,
지금이 협력사와의 업무 구분 실태와 지휘명령 관계를 점검하고 리스크를 사전에 관리할 적기입니다. 🙂
다음 편에서는 불법파견 성립 여부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과 최신 판례 경향을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본 내용은 대법원 2024. 3. 12. 선고 2019다223303 등 판결 및 관련 법령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구체적인 사안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HR > 유지관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4시간만 일하면 즉시 퇴근?” 달라지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핵심 4가지 (0) | 2026.05.18 |
|---|---|
| 노란봉투법 시행 후 노동위원회는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을까? — 최신 사례 총정리 (1) | 2026.05.15 |
| 📋 직장 내 괴롭힘 신고 후 인사발령, 이것도 '불리한 처우'가 될 수 있다고요? (0) | 2026.05.06 |
| 노란봉투법 원·하청 상생 교섭절차 매뉴얼 핵심은? (0) | 2026.02.27 |
| 노란봉투법 이후, 대체근로는 어디까지 허용될까? (1) | 2026.02.27 |